2018.9.10 월 18:29
 낭만산책/동양고전 4
 닉네임 : 나란다 강의실  2016-09-24 04:02:09   조회: 3051   
일찍이 나폴레옹이나 조지 패튼, 롬멜 장군 등이 손자(孫子)의 병법서(兵法書)를 읽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이것을 너무 늦게 읽은 것을 후회했다. 조조는 여기에 주석을 달았고 모택동도 이것을 탐독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31세의 젊은 무하마드 국방장관은 최근 여기에서 정치적 영감을 얻는다고 공언하고 있다.

기원 전 6세기 말 춘추시대, 오나라의 손무(孫武)는 연전연승하면서 주변국들을 유린하고 서방의 초나라를 거의 멸망까지 몰고 갔다. 오나라 왕은 기고만장해졌다. 손무가 반대했지만 왕은 남방의 월나라를 침공했다가 부상을 당한 후 죽었다.

오나라의 아들 왕은 장작 위에서 자면서 복수의 칼을 갈더니 결국 월나라를 크게 격파했다. 그러자 그 역시 기고만장해졌다. 손무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히 군대를 몰고 북쪽 제나라를 침공했다. 그러자 곰 쓸개를 핥으며 재기를 노리던 월나라가 바로 오나라에 쳐들어와 빈집털이에 성공했다. 그 후유증으로 오나라는 멸망하고 왕은 자살한다. 그 무렵 손무는 은퇴하고 병법서를 썼다. 이것이 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역사상 최고의 병법서, 손자병법이다.

기원전 4세기 중엽 전국시대, 강대국 위나라는 이웃 조나라를 침략해서 도성을 포위했다. 제나라는 구원요청을 받았다. 손무의 후손인 제나라의 손빈은 조나라로 향하다가 도중에 방향을 바꾸어 위나라 본국을 기습했다. 약체 군대만 남아 있던 위나라는 급히 파병군대를 불러들였다. 포위망이 풀리고 조나라는 살아났다. 손빈은 길목을 지키며 기다리다가 회군하는 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손빈이 위위구조(圍魏救趙)의 작전으로 승리한 이 전투를 계릉 전투라고 한다.

얼마 후, 위나라가 다른 이웃 한나라를 침략했다. 제나라는 역시 구원요청을 받고 한나라에 군대를 파병했다. 이번에도 손빈은 한나라로 가다가 도중에 위나라 본국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막강한 수비군대가 반격했다. 위나라는 한나라에 파병된 군대를 불러들였다. 일단 한나라는 살아났다. 위나라는 수비군대와 돌아온 파병군대와 함께 손빈의 군대를 양쪽에서 협공했다. 손빈은 도망가면서 교묘한 유인작전을 폈다. 이에 걸려든 위나라의 대규모 군대는 어둠 속에서 계곡에 갇힌 채 전멸했다. 손빈이 감조지계(減竈之計)의 작전으로 승리한 이 전투를 마릉 전투라고 한다.

계릉과 마릉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위나라는 매년 제나라에 조공을 드리는 입장에 되었다. 그리고 제나라에게 큰 도움을 받았던 조나라와 한나라 역시 조공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조공을 드리는 위, 한, 조의 삼국은 오래 전에 같은 나라였다. 분열 되기 전에는 강대국이었지만 분열된 후에는 서로 전쟁을 하다가 세 개의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산뚱반도의 제나라는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되면서 자만에 빠지게 된다. 남쪽의 초나라는 이웃 나라가 커지는 것을 견제하더니 제나라를 침공한다. 한편 위나라가 패전으로 약해지자 서쪽 변방에서 칩거하던 진나라가 슬금슬금 중원의 중심부로 진출하여 제나라를 위협했다. 세월이 흐른 후 제나라는 진나라에 멸망 당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라는 말이 여기서 통한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제나라가 계릉과 마릉 전투에서 위나라를 상대로 너무 크게 승리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것은 마치 약체 팀을 상대로 우리 팀 최고의 에이스를 투입한 격이다. 결과적으로 팬들이 너무 싱거운 게임에 구장을 떠나가버려 오히려 구단에 손해를 끼진 것과 같다.

메이저리그 다저스 팀의 카쇼 투수는 아주 낮은 방어율을 유지하며 완투승은 물론 완봉승도 밥 먹듯이 한다. 그가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투수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카쇼가 출전하면 다저스 팀은 물론 승리하지만 그 게임은 거의 그의 원맨 쇼가 되어 버린다.

아홉 명이 싸우는 야구에서뿐만 아니라 수 만 명이 싸우는 국가간의 전쟁에서도 원맨 쇼가 있다. 손무나 손빈 모두 원맨 쇼를 하면서 자신들의 나라를 강대국 반열에 올렸다.

손무에게는 오자서 장군이 있었고 손빈에게는 전기 장군이 있었다. 손무와 손빈이 치른 전쟁을 그들의 원맨 쇼라고 말하는 것은 용맹한 장군들의 활약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장군들이 용맹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100 마일의 강속구를 스트라이크 존으로 계속 던지는 투수에 불과했다. 투수는 모든 이닝에서 그런 식으로 던지면서 승리할 수 없다. 그보다는 타자의 습성과 의도를 파악하고 직구와 변화구 그리고 볼과 스트라이크를 배합하면서 타자들을 속여야 승리투수가 된다.

타국(他國)과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이 장군들은 자국(自國)에서의 정치적 행보에 실패했다. 오자서 장군은 왕의 미움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기 장군은 주변 대신들의 모함을 받고 초나라로 도망가게 된다.

반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월나라의 중신 범여(范蠡)는 일찍이 왕의 마음을 읽었다. 전쟁승리의 세리머니도 끝나기 전에 미련 없이 조국을 떠난다. 이것은 7회까지 던져 승리투수의 여건을 갖춘 후 구원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기고 유유히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선발투수의 모습이다.

역시 큰 공을 세운 월나라의 중신 종(鍾)이 있었다. 그는 범여의 충고를 무시하고 남아 있었다가 역모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죽음은 주변인물들의 시기와 모함이 원인이지만 승리에 기여한 공신에 대한 왕의 부담감도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선발투수가 완투승에 욕심을 갖고 무리하게 투구하다가 9회말에 동료선수의 실책으로 어이없이 패전투수가 된 격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므로, 이해와 득실을 충분히 검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손무는 손자병법 제 1편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손무 선생의 철학은 가능하면 전쟁을 피하는 것이고 피치 못해 전쟁을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초, 고대희랍의 피로스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까지 진출하여 고대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전쟁의 명분도 희미했고 병력손실도 상당히 컸다. 피로스 왕은 승리했지만 이런 승리를 한 번 더 했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왕이 희랍으로 돌아가자 이탈리아 반도의 희랍세력들은 모두 로마에 항복하였다. 전쟁의 성과마저 없어졌다. 이렇게 재미없는 승리를 우리는 ‘피로스의 승리’라고 부른다. 금세기 초, 미국이 중동에 진출하여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과 전쟁을 해서 거둔 승리는 피로스의 승리를 연상시킨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파비우스의 승리라는 것이 있다.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거나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끝끝내 이기는 것을 뜻한다. 기원전 3세기 말, 고대로마의 공화정 시절이었다. 북 아프리카에 위치한 카르타고의 하니발 장군이 코끼리 떼를 몰고 스페인을 거쳐 한겨울의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북쪽에서부터 로마제국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니발이 가까운 지중해를 건너와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으로 쳐들어올 것을 예상했다.

당시 로마의 지도자 파비우스는 전쟁을 피하고 한니발 군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식량보급을 철저히 차단했다. 정정당당한 전투를 추구하는 당시 로마의 기풍 아래서 파비우스는 시민들로부터 온갖 비방을 받았다. 결국 파비우스가 실각하고 강경파가 득세했다. 그러나 하니발에 대항하여 소위 정정당당한 전투를 하다가 로마는 일격에 7만의 병력을 잃었다. 로마인들은 하니발을 너무 몰랐었다.

하니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첫째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둘째는 희랍의 피로스 대왕 그리고 세번째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일견 일리가 있지만 이 말은 하니발이 오나라의 위대한 손무선생을 모르고 한 이야기다. 하니발 이후에 그와 필적할 만한 장군이라면 로마의 천재 줄리우스 케사르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다시 파비우스는 실권을 잡고 하니발 군대와 지구전을 폈다. 속전속결로 승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하니발 군대는 사기가 많이 떨어졌다. 그러던 중 로마 해군이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자 하니발에게 회군 명령이 떨어졌다. 로마는 살아났다.

파비우스는 ‘로마의 방패’라는 영광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진정한 용기를 지닌 정치가는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이익을 중히 여긴다. 파비우스의 전술이 당시엔 지도층에게도 시민들에게도 인기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로마를 구한 것이다.

강타자가 타석에 등장했을 때 무리하게 스트라이크를 던질 필요가 없다. 그냥 1루에 내 보내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다. 물론 투수가 관중들에게 야유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팀의 승리가 더 중요하다.

3세기 초, 촉나라의 제갈량은 출사표를 던지고 위나라를 치는 북벌을 감행했다. 5차에 걸친 북벌은 모두 실패하고 마지막 북벌에서 그는 전사한다. 너무나 유명하고 훌륭한 인물이 한 일을 우리가 비판을 하는 것은 좀 무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손자병법의 시각에서 제갈량이 치른 전쟁을 한 번 살펴본다.

출사표를 쓴 제갈량이야 유명한 사람이지만 그것을 읽어야 할 촉나라의 유선은 별로 유명한 황제가 아니다. 유비의 아들 유선은 수준 이하의 황제라서 출사표를 읽을 능력이나 의지조차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이 출사표는 제갈량이 황제를 위하여 쓴 것이 아니고 후세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쓴 글 혹은 지나간 삶을 정리하는 유서처럼 보인다.

손무 선생이 만일 이 출사표를 보았다면 의문을 품었을 것 같다. 출사표에서 제갈량은 유비에 대한 고마움, 자신의 과거, 신하들의 대한 품평, 자신의 충성심 등을 상세히 적었는데 정작 당장 치르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출사표 원문에서 전쟁의 명분을 찾아 보면, 옛 한나라의 도읍지를 되찾고 왕실을 부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소국이 강대국 위나라에 선제공격을 한다는 것은 사리에 안 맞다. 차라리 부국강병을 하면서 공격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당시 촉나라가 내정의 어수선함을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해결 했다는 설도 있어서 위대한 제갈량을 더 이상 비판할 수도 없다.

4차 북벌에서는 위나라의 노장 사마의(사마중달)가 제갈량의 대항마로 등장한다. 그는 진을 치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3 개월 간 두 영웅이 대치하다가 제갈량의 군대는 식량이 떨어져 철수한다. 사마의가 그 철수하는 군대를 공격하다가 너무 깊이 들어가는 실수를 범했지만 일단 촉나라의 4차 북벌을 막아낸 것이다.

몇 년 뒤, 5차 북벌에서는 제갈량이 10만 군대를 몰고 왔다. 식량문제를 해결하려고 본진 주변에 경작지를 개발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했다. 이번에도 대항마로 나선 사마의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그를 움직이려고 갖은 모욕을 주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이미 제갈량의 병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제갈량이 남은 목숨을 불사르면서 휘두르는 예봉을 묵묵히 피했다. 결국 제갈량은 병사하고 촉나라는 철수한다.

이 북벌은 정말 재미없는 전쟁이었다. 여기서는 삼국지 1 세대 영웅들이 보여 주었던 불꽃 튀는 싸움도 없고 박진감 넘치는 작전도 없었다. 그러나 손무 선생은 아마 사마의를 최고의 장군으로 인정할 것이다. 위나라는 별로 잃은 것이 없었다. 4차 북벌 때 유능한 장군 장합을 잃은 것이 좀 아쉬울 따름것이다.

위나라 황제는 사마의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조조의 후손 조씨들이 득실대는 조정에서 사마씨가 권력을 잡기는 힘들었다. 그후 10년 간 사마의는 씨름판에서 샅바도 못 잡아보고 밀려나 판 주변에서 서성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상대방의 허점을 본 순간, 좀 비겁하지만 전격적으로 기습한 후 들배지기로 상대를 쓰러뜨렸다. 그는 71세에 쿠데타에 성공하였다. 조조의 밑에서 근무한 지 41년 만에 위나라의 대권을 잡았다. 사마의는 “상대에게 살을 베게 하고 자신은 상대의 뼈를 자른다.”는 자세로 끈질기게 그날이 오기만 기다린 것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들이 중원의 통일을 위하여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칼춤을 추었다. 그러나 그런 퍼포먼스의 열매는 무대 뒤에서 숨만 쉬면서 발톱을 숨기고 있던 자에게 돌아갔다. 유씨도 조씨도 오씨도 제갈씨도 아닌 바로 사마씨가 통일왕조를 세운 것이다. 그의 손자 사마염이 정식으로 진(晉)왕조를 설립하였고 진 왕조는 서진과 동진을 합쳐서 약 150년 정도 지속되었다.

“적의 실정을 먼저 알려면 귀신에게 물어도 소용 없고, 과거 사례로부터 추측할 수도 없고, 법칙이나 경험에 의존할 수도 없다. 반드시 사람을 통하여 알아내야 한다." 손무는 병법서 제 13편에서 이렇게 정보전의 중요함을 이야기하며 간첩의 활용방법을 논하고 있다. 이 법칙은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에서는 우리와 친숙한 CIA나 FBI 그리고 NSA 이외에도 아주 많은 국영 정보기관이 있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각 기관의 정보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서 백악관은 자기 입맛에 맞는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다.

금세기 초, 911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 이전에 미국 정보기관은 항공기 납치에 의한 테러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정보기관들 사이의 협조가 부족하여 그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

사건의 배후는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세력으로 밝혀졌다. 알카에다는 테러 조직들이 빈 라덴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뭉쳐진 조직이다. 미국은 아프카니스탄 정부에게 빈 라덴의 인도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 집권세력인 탈레반이 빈 라덴의 인도를 거부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했지만 빈 라덴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은 거의 궤멸상태가 됐다.

이때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허위 정보가 돌았다. 미국이 병력을 분산하여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 덕에 아프칸의 탈레반이 살아났다. 미국은 이라크 전에서 승리했지만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다. 좀 맥 빠지는 승리라서 고대 희랍의 피로스왕이 연상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 종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라크의 반군세력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당시에는 몰랐다. 종전선언 후 발생한 이라크 내전으로 숱한 미국병사들은 예상치 못하게 희생되었다.

최근 탈레반이 아프카니스탄에 복귀하는 중이고, 이라크는 또 다시 내전에 시달리고 있고, 시리아의 무장세력 IS가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막대한 예산과 병력을 투입했지만 실속을 별로 얻지 못했다. 그 원인을 찾자면 미국의 정보능력의 부족을 한 가지로 들 수 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했다.

테러 직전, FBI는 항공기 납치에 의한 테러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못했다. 당시 FBI가 그 정보를 CIA와 공유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2016년에 이르러 두 정보기관이 911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려는 해묵은 논쟁이 몇 달 전 일간지에 공개 되었다.

2001년 10월,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칸에 은거하고 있었다는 정보가 있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아프칸을 침공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력과 정보력으로도 빈 라덴을 아프칸에서 찾지 못했다.

세월이 흐른 후 오바마 정권은 군사작전을 벌여 빈 라덴을 파키스탄의 안가(安家)에서 찾아 냈다. 파키스탄은 계속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적이었는데 빈 라덴이 어떻게 파키스탄까지 무사히 여행할 수 있었는지 좀 이상하다. 일설에 의하면, 빈 라덴은 오바마 정권 이전에 이미 죽었고 그 안가에서의 군사작전은 하나의 퍼포먼스라고 한다. 당시 빈 라덴의 시체가 공개되지 않아 그런 설이 나올 만도 하다.

미국이 아프칸에서 빈 라덴을 찾지 못하고 허둥댈 무렵, 이라크의 정치망명객 찰라비(Chalabi)가 등장했다. 그는 딕 체이니 부통령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WMD)가 엄연히 존재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 이라크 국민들이 flower와 candy로 미군을 환영할 것이다. 라는 것이 찰라비가 제공한 정보였다.

일찍이 손자선생이 적의 실정을 알려면 귀신도 믿지 말고 오직 사람을 통해서 알라 내라고 했다. 미국은 적국의 정치망명객의 말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보다는 미국의 훈련된 정보요원들을 적국에 보내어 적의 실정을 파악해야 했었다.

2003년 3월, 미영 연합군 이라크를 침공하고 전격적으로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과거 senior 부시의 걸프전보다 훨씬 박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라크 국민들은 flower와 candy로 미영 연합군을 환영하지 않았고 현장의 상황도 공화당의 네오콘들이 예상한 대로 되지 않았다. 이라크는 무정부 상태가 되고 전국에서 폭도들의 약탈이 횡행했다. 그리고 이라크 반군들이 미군들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무렵, 부시 행정부는 일찌감치 2004년의 대선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서 이런 뉴스들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 해 4월, 네오콘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이라크 약탈사태에 대하여 한 마디 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미 합중국의 장관으로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선거를 의식해서 이라크 침공의 성과를 한껏 높이고 문제를 되도록 축소하려고 했다.

럼스펠드 왈 “자유라는 것은 어수선하기 마련이다. 자유국가의 국민들은 실수도 하고, 범죄도 저지르고, 나쁜 짓을 할 자유도 있다.”
Freedom's untidy and free people are free to make mistakes and commit crimes and do bad things.

그 해 5월, 아브라함 링컨 항공모함 선상에 경비행기가 착륙하고 문이 열리자 조지 부시 대통령이 사뿐히 뛰어 내렸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이라크전의 주요한 전투는 끝났다(major combat operations were over)고 선언했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선거를 의식해 이런 퍼포먼스가 필요했을 것이다. 부시의 발표 이후 토미 프랭크 사령관 그리고 수백 명의 정보장교를 포함한 그의 본부 요원들이 전장을 떠났다.

그 해 6월, CIA는 이라크 반란군들의 게릴라 활동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백악관에서 브리핑을 했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어리석게도 이 정보를 무시했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순식간에 승리하고 미군들이 조속히 본국으로 철수하는 것은 차기 대선에 큰 호재가 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공화당의 네오콘들은 CIA의 이런 비관적인 정보를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백안관은 당시 반군들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로 속을 썩이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의 가장 중요한 명분인 대량살상무기가 이라크에서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부시는 연초 연두교서에서 나이제리아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를 판매했다고 허위진술을 했다. 그러나 CIA 요원 발레리와 그 남편 윌슨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내어 부시 행정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이라크 반군들은 예상외로 끈질겼다. 미국은 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고 본다. 2011년 12월, 미국은 진정한 의미의 종전을 선언하고 미군들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두 달 만에 승리하고 그 후 8년 간 반군들과 기나긴 전투를 했다.

2009년,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최근 대통령들 중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고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이 되었다. 여기서 도날드 트럼프가 전당대회에서 국무장관 시절의 힐러리의 과오를 논하는 부분이 있다.

“ISIS는 전세계에 퍼졌고, 리비아는 폐허가 되고 미 대사와 직원들이 피살되고, 이집트는 무슬림 형제단에게 정권이 넘어가고, 이라크는 혼돈의 상태이고, 이란은 핵무장을 준비하고 있고, 시리아는 내전에 휘말리고, 난민 문제는 서방세계를 위협하게 되었다”는 트럼프의 말도 그럴듯하다. 민주당과 힐러리 외교팀이 중동문제를 잘 못 다루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에 반박의 기회를 주면 모든 문제는 상당한 부분 공화당 부시 행정부의 유산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이런 비생산적인 정치문제는 더 이상 다루지 않기로 한다.

트럼프와 힐러리의 연설을 들어보면 대체로 피상적인 부분이 많다. 즉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 지난 15년 간의 미국의 중동전이 아무런 성과 없는 피로스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은 우선 정보수집능력이 부족했고 그 정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민주당의 외교실패에도 적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펌프 후보나 힐러리 후보나 모두 국가의 정보력의 중요성을 별로 논하지 않고 있다. 아마 현안 문제로 이민정책, 개인 이메일 사용 건, 경제살리기 등의 문제가 사실 국민들에게 더 피부에 닿고 표와 직결되기 때문인 것 같다.

September 19, 2016/ jps

To be continued sooner or later
2016-09-24 0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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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thony@gmail.com (76.xxx.xxx.206) 2017-02-21 13:56:08
시공을 초월하며 역사개진의 여러가지 아날러지를 찾아내어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앞으로 트럼푸의 행보는 어디로 갈 것인지 궁굼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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