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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과거도 나의 모습이었다”
[박흥진의 할리웃 산책] ‘로켓맨’의 주인공 엘튼 존을 만나다
2019년 07월 08일 (월) 12:18:04 박흥진 기자 acro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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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수퍼스타 록가수 엘튼 존(72)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활기가 넘쳤다. 엘튼 존은 검은색 정장에 커다란 검은색 나비넥타이를 하고 꿀빛으로 색칠한 안경을 쓴 채 인터뷰에 임했다. 오른쪽 귀와 오른쪽 옷깃을 다이아몬드 귀고리와 나비 장식으로 치장해 화려함을 뽐냈다.

엘튼 존의 생애를 그린 뮤지컬 영화 ‘로켓맨’을 위한 인터뷰가 최근 영국 런던의 코린티아호텔에서 있었다. 엘튼 존은 질문에 유머와 위트를 섞어가면서 큰 제스처와 함께 정력적으로 대답했는데 그 모습이 장난꾸러기 아이 같았다. 술과 약물복용 전력과 성적 문제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동성애자인 엘튼 존의 옆에 그의 ‘남편’이자 이 영화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퍼니시(56)가 앉아 가끔 엘튼 존의 대답을 도와주었다. 둘 사이에는 8살과 6살 난 두 아들이 있다. 엘튼 존은 지난해 두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무대공연 은퇴 의사를 밝혔는데 현재 고별 순회공연 중이다.

-이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선을 보였을 때 당신 역을 맡은 배우 태런 에저튼을 극구 칭찬했는데.
“태런이야말로 태런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아직도 살아 있는 내가 영화에서 내 모습을 본다는 것은 아주 이상한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전기영화는 죽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런데 태런이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 영화를 보면서도 배우가 날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칭찬이 어디 있겠는가. 연기뿐 아니라 그는 노래도 직접 불렀는데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의 연기에 그저 놀라고 경탄했을 뿐이다.”
  
-당신은 작곡에 천재적 재능이 있어 단숨에 노래를 작곡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나와 오래 함께 일한 작사자 버니 터핀이 쓴 가사에 멜로디를 입히는 것이어서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난 작곡에 믿을 수 없는 재능을 갖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유어 송’도 30분 만에 작곡했다. 어떤 곡을 30분 만에 끝내지 못하면 잠시 중단했다가 다시 돌아와 작곡한다. 난 매일 작곡하진 않는다. 필요할 때만 작곡한다. 작곡할 준비가 되면 흥분이 되면서 작곡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으면 무언가 일어난다.”

-당신은 로열음악아카데미에서 클래식 음악을 수련했는데 왜 포기했는가.
“난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듣고 즉시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음악 공부를 시켜달라고 부탁했고 당시 우리 동네에 살던 존스 부인으로부터 음계를 비롯해 음악에 대해 배웠다. 바흐와 모차르트, 쇼팽을 연주했는데 정말로 좋았다. 이어 로열음악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때 제리 리 루이스와 리틀 리처드 같은 미국 팝 가수들의 노래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내 손은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손이 아니다. (그는 이때 두 손을 들어 짧은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아카데미에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음악도들이 많았다. 나는 옳게 치는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쇼팽과 모차르트와 바흐와 바르톡의 곡들을 연주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따라서 내 음악들은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받고 있다. 로열아카데미 시절은 아주 귀중한 경험이었다. 난 아직도 아카데미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58년에 그곳에 입학했는데 그 당시 학교에서는 로큰롤과 재즈 등은 못 들을 음악인 것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다르다.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것이 정말로 기쁘다. 교육은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 생애의 절정기와 함께 어둡고 슬픈 상황도 그렸는데 왜 어두운 모습까지 보여줬는가.
“내 생애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제의가 왔을 때 난 솔직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성공은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난 그것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 사실을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의 진면목이라고 알리고 싶었다. 내 삶을 전부 밝고 화려하게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어두운) 과거를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난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거기서 빠져나온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구원이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난 약물과 술에 절어 살았다. 그런 나를 음악이 살려주었다.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난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의 해리 왕자와 그의 아내가 갓난 아들을 위해 나중에 피아노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니다. 난 좋은 선생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피아노란 자기가 치고 싶어야 하고 또 어느 정도 소질이 있어야 한다. 억지로 가르친다면 성공할 수가 없다. 우리 아들들도 피아노 공부를 하는데 아주 좋아한다. 나처럼이야 될 수 없겠지만 둘은 피아노 치기를 아주 좋아해 그것만으로 족하다. 난 그들에게 피아노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해서 치는 것이다.”

-두 아이에게 어떤 부모인가.
“우선 내 부모 얘기를 하자면 그들은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둘은 전후에 전격적으로 결혼했는데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혼하고 싶어했지만 당시는 매우 보수적인 시절이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러고도 함께 산 것은 내 교육 때문이었다. 난 늘 야단만 맞으면서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다. 난 아이들에게 결코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대화를 한다. 그리고 남편 데이비드와 함께 아이들에게 항상 사랑한다고 말하고 입 맞추고 끌어안는다. TV로 축구도 함께 본다.”

-당신은 에이즈 예방과 치료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데 에이즈로 사망한 많은 록가수들과 달리 건강히 잘 살고 있다.
“난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난 과거 에이즈 문제에 대해 봉사와 기여를 하긴 했지만 결코 충분하진 못했다. 동성애자로서 일선에 나서야 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1992년에 애틀랜타에 엘튼 존 에이즈 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에이즈로 사망해 재단 설립은 내 숙원사업이었다. 그 일은 내 영혼을 위한 것이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난 2주 후면 죽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날라다주기도 했다.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이야말로 내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였다. 에이즈가 창궐하던 1980년대 끊임없이 순회공연을 할 때 난 약물중독자였고 자신밖에 몰랐다. 책임감을 완전히 상실했었다.”

   
인터뷰 후 필자와 사진촬영을 한 엘튼 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부분과 즐거웠던 부분은 어느 것인지.
“약물중독 장면이 보기에 괴로웠다. 그때는 참으로 어두운 때였다. 감동적으로 본 장면은 약물중독자 치료소에 있는 나를 버니가 찾아왔을 때다. 당시 나를 살려준 것은 그와의 우정이다. 우린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과거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재생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다. 그와의 우정을 생각하면 늘 감정에 복받치곤 한다.”
  
-당신의 애인이었던 매니저 존 리드와의 노골적인 섹스 장면을 영화로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그 장면을 놓고 우린 처음에 갑론을박을 했다. 내 삶을 얘기하자면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존과의 섹스가 첫 경험이었다. 당시 난 사랑과 가까운 관계를 갈구했다. 우리 둘이 옷을 찢고 격렬히 섹스하는 장면은 사실 그대로다. 난 동성애자로서 그 장면을 결코 불투명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희열에 가득 찬 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그를 내 팔에 안고 미소를 지으면서 ‘이제 섹스를 했으니 난 정상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난 23세였는데 숫총각이었다.
어렸을 때 내 아버지는 내게 수음을 하면 눈이 먼다고 말했다. 그런데 13세 때부터 안경을 써야 했다. 당시 나는 ‘아이고 맙소사 올 것이 왔네’ 하고 놀랐었다. 그런 동성애 장면을 허락한 영화제작사 파라마운트에 감사한다.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로 이렇게 노골적인 동성애 정사 장면을 담은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난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장면을 뺏더라면 내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을 것이다.
난 재능에 대해 얘기하지도 자랑하지도 않는다. 무대나 녹음실의 나를 결코 집에까지 동반하지 않는다. 골드레코드와 성공에 따른 온갖 기념물들을 자랑스럽게 여긴 적도 있으나 지금은 다 창고에 쌓여 있다. 그런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때는 이미 지났다. 작곡이 안 될 때면 이젠 그냥 내려놓는다. 난 가사나 대사만 있으면 노래나 뮤지컬을 쉽게 작곡할 수 있다. 가사만 있으면 그림이 저절로 눈앞에 떠오른다. 물론 때론 내 재능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항상 쉽게 작곡할 수 있다고 떠벌리는 음악가는 자존을 잃은 사람이다. 자기 재능에 대해 의문을 갖고 따져봐야 보다 나아질 수 있다.”

-어떻게 해서 술과 약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가.
“무척 많은 노력을 했다. 다시 인간이 되는 길을 배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남의 말을 경청해야 했다. 타인의 친절이 많은 도움이 됐다. 술과 약물 중독에서 벗어난 뒤 첫 한 해는 순회공연을 하지 않았다. 3년간 1,200회의 중독자 모임에 나갔다.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리고 비로소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창조적인 사람들에겐 어두운 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내 아이들이 있는 이상 이젠 내게 어두운 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어두운 질곡에서 빠져나오게 한 사람 중 하나가 데이비드 퍼니시이다. 술과 약물 중독자들은 오랜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다. 중독 상태에서 벗어난 뒤 데이비드와 만났는데 지금까지 25년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다 변화를 갈망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박흥진 <미주 한국일보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 할리웃 외신기자협회(골든글로브상 심사) 회원, LA영화비평가협회 회원 / 한국일보 서울본사 외신부 사회부 기자 역임 / 경복고, 서울대 사대 독어교육과 졸 / LA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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